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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꿈은 매우 위험하다.

by J_One. 2023. 4. 5.



피로가 절정을 찍었던 지난주에는 공사로 인해 집에서 쉴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대안으로 동네 카페에 가서 작업을 하는 것을 택했다. 예전에는 꽤 자주 갔었는데 요새는 도통 들릴 일이 생기질 않는다. 늘 그래왔듯이, 주문대 뒤의 메뉴판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멤버십 적립 하시나요?'
 
하도 오랜만에 방문하는 곳이라 멤버십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일단 단말기에 꽂힌 심 없는 플라스틱 펜을 집어 단말기에 번호를 무심하게 입력했다.
 
'휴면 계정 상태이신데, 어플로 로그인 하셔서 푸셔야되요'
"아 그럼 그냥 주세요"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작업을 하다가 두 시간이 넘어갔을 때, 출출하기도 하고, 요즘 그게 암묵적인 매너라는 말을 지나가면서 들었기에 음료와 와플을 하나 더 시켰었다. 물론, 그때도 지웠던 어플을 설치한 후,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먼 기억 속에서 호명해 '휴면 계정'을 푸는 번거로운 작업은 수반되지 않았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나면 항상 집중력이 흩어진다. 그럴 때는 잠깐 바람을 쐰다는 핑계로 나가서 담배를 태우고 온다. 가방에서 휴대용 탈취제를 찾아 주머니에 쑤셔넣고, 어슬렁거리며 잠시 카페 밖으로 나온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입구, 상가의 외진 곳에 흡연 구역이 자리해있다. 흡연 구역과 주차장 진입로 사이에는 어떠한 연석도 없지만, 그곳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등 뒤로 차가 오르내리는 것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는다. 마치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가벽이 설치되어 있는 것처럼.
 
거기서는 한강으로 이어지는 천을 따라 나있는 산책로가 내려다보인다. 한참 꽃이 만개하는 시기라 풍경이 꽤 아름다웠다. 독한 연기를 내뿜으며 니코틴을 아세티콜린과 마찰시킬 때는 누가 펜으로 찌른 것마냥 사고가 팽배해진다. 이후 스케줄부터 메일 답장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다음 문장은 어떻게 써내려갈 것인지 등등..
 
니코틴에 허기졌던 아세티콜린이 포만감을 느끼면 사고의 수준은 추락한다. 오늘 저녁 뭐 먹지, 운동은 언제 가지 같이 지극히 비생산전인 것들로 이어진다. 그러다 단톡방에 새로온 메세지는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면 적당한 대답거리를 생각해 답장을 보내놓는다. (대부분 단톡방의 알림은 꺼져있기에 하나씩 확인해야 한다)
 
아세티콜린이 고대하던 수용체를 한껏 공급해준 후 다시 자리에 앉으면 작업의 페이스는 저단 기어로 바껴있다. 듣던 음악도 어딘가 심심하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내 취향과 맞지 않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그러면 나는 항상 팟캐스트를 찾는다. 주로 내가 예전에 다 한 번씩 들었던 것을 다시 듣는다.
 
그 날의 선택은 내가 존경하'던' 철학자의 것이었다. 여러가지 주제 중에 뭐를 들을까 하다가 '꿈'이라는 형식적이지만 묘하게 자극적인 테마의 것을 재생시킨다. 이후 다시 손이 키보드 위에서 기계적으로 반응하게 관망한다. 이런 일은 이제 매우 일상적이라 자각하기 힘들지만, 조금 지친 상태에 들어가면 왠지 제 3자가 되어서 뇌가 꺼진 상태로 일을 계속하는 나를 지켜보게 되는 것만 같다.
 
'꿈의 목적은 제거하는 것에 있다'
 
에어팟 속 철학자가 서두에 던진 이 문장을 듣자마자, 과거에 내가 이 팟캐스트를 들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 순간이 있다. 경험한 것인데, 경험했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게 되는 것. 날이 추워지는 시기에는 장갑을 끼고 운동을 나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정작 기온이 떨어지면 과거의 기억이 재생된다. 마찬가지로 날이 풀리면 한낮의 햇볕 아래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선택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기계적으로 작업을 이어가다가 조금씩 머리 속에 팟캐스트 내용이 자리를 잡는다. 그가 얼마나 달변가인지, 지금보다 서너살 어렸을 때, 그가 설파하는 철학에 내가 얼마나 매료됐었는지, 그 기억들이 조금씩 꿈들거리며 일에 집중 할 수 없게 만든다.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없는 것은 사실 하나가 더 '있다'라는 것이다"는 비유, 혹은 설명이었다. 이별을 경험했을 때의 '없다'는 것은 사실 '있었던 것이 없어진 것' 다시 말해 그 부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최초부터 '없다'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유라는 것이다.
 
그는 '꿈이라는 것은 없는 게 이롭다'고 이야기한다.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눈 앞에 영화에, 사랑을 나누는 연인에게 ‘몰입’ 할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없다. 내 머릿속에서 대답이 크게 울렸다. 그래서다. 난 아무것에도 몰입할 수 없는 상태다. 내일과 숫자만으로 가득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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