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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성수와 건대 사이.

by J_One. 2022. 10. 26.

P와 갑작스럽게 저녁을 먹게 됐다. 시간은 퇴근 시간보다 살짝 늦어지며 2호선은 조금 숨이 트이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탄 열차는 비교적 신식이었다. 언제부터 2호선 열차들이 새단장을 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군 복무로 잘려나간 기간 때문에 셈은 쉽지 않았다. 최근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출퇴근 시간의 열차는 이 열차가 신식인지 구식인지 판가름 할 여유 있는 공간이 아니기에, 의미있는 회상은 불가능했다.

역삼, 삼성 그리고 잠실, 송파. 사무실이 혹은 주거지가 몰려 있는 역에서의 승하차는 늘 숨 막힌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의 긴 행렬에서 비교적 앞쪽에 서있다고 해도 이미 열차 안은 뺴곡하게 꽉 차 있어 탑승하지 못하는 일이 잦다. 그러한 연유로 탑승에 실패했지만 통근 시간이 근접한 몇몇 행인들은 다음 칸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지 잰걸음으로 뛰기 마련이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는 항상 여유 시간을 충분히 두고 출발하는 편이다. 단, 이는 일적인 상황에서만 거의 적용된다. 친구들을 만날 떄는 굳이 여유 시간을 두지 않고 빡빡하게 이동한다. 그래서 '지각자'에 대한 벌칙으로 밥을 사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물론 요즘 같은 불경기에 불필요한 지출이 발생하는 것은 매우 부득이한 경우이기에, 이제는 사적인 약속에서도 시간을 잘 지키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비교적 한가한 시간대의 플랫폼도 열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에는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0과 1의 충돌. 주머니 속 폰에서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으로 날아 오르는 신호들은 다른 승객의 것들과 부딪힌다. 열차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내리고, 새로운 승객들이 타고,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이 사이에 무형의 교통사고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다.

열차는 한강 위를 달린다. 강변역으로 향하는 구간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서울 시내의 모습이 창 밖으로 스쳐간다. 평일 저녁, 서울의 도로는 갑갑한 느낌이 항상 들지만 붉은 후미등의 행렬을 멀리서 지켜보면 나름 장면이다. 거리의 풍경은, 뭔가 새 것 같은 느낌을 준 열차와 달리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경미한 추돌 사고가 몇 번 반복된 이후, 마침내 성수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서 2번과 3번. 1번과 4번 출구로 향하는 계단이 양 끝에 걸려있다. 나는 괜히 앞쪽에서 열차를 탄 것을 후회하며 복도처럼 길게 난 플랫폼을 따라 뒤로 걸었다. 다른 역보다 상대적으로 좁은 성수역의 플랫폼에서 행인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가방을 최대한 내 몸에 밀착시킨다.

P는 개찰구 앞에서 통화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며 열차를 타고 온 터라 하마터면 못 알아차릴 뻔 했다. 통화 상대는 P보다 다섯 살 연상인 여자친구. 이제 5년 가까이 된 이 작가 커플은 성수에 회사를 다니며, 성수에서 같이 살고 있다. P는 그녀를 '내무부장관님'으로 표현한다. 내가 오래 연애하면서 동거까지 하고 있는 P를 부러워 할 때마다 P는 유부남인 것 마냥 내게 한숨으로 응답한다. '연상 여자친구는 만나지 마라', '여행 같이 가면 무섭다', '너무 피곤하다' 같은 소리를 늘어 놓는데 기만도 이런 기만이 또 있겠는가.

날이 살짝 추워지고 있어 우리는 빠르게 저녁을 할 식당 후보군을 리스트업했다. 이런 상황일 때마다 대부분 육류로 귀결 됐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반 년만인가?'
그렇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올해 초였는데.

우리는 식당으로 향하다가 골목길에 서서 연초를 태웠다. 신세 한탄, 짤막한 근황 그리고 그의 기만이 이어지는 가운데 연초는 필터만을 남기고 장렬히 산화했다.

'맛있게 먹고, 값있게 죽자'

식당에 들어선 우리는 세트 메뉴를 시키고 술을 한 잔했다. 술을, 특히 소주를 마신 것도 반년은 더 된 것 같다. 체내에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는 나는, 우리가 시킨 소주의 빨간 뚜껑 마냥 빠르게 얼굴이 상기됐다.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지만 나는 토 해내듯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확실한 것은 그 날 대화에 꽤나 많이 위로를 받았단 것이다. 취기가 묻어 나오는 오글거리는 말들이 많아 다시 서술하기는 꺼려지지만, 자리를 파하고 보낸 문자를 보면 충분히 값진 자리였다.

우리는 술을 빠르게 마셨고,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충분히 취한 상태였다. P는 내무부장관님과의 약속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기 곤란한 상황이었고,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은 나를 위해 근처에 숙소를 잡은 후 바래다 줬다. 우리는 체크인을 한 후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다시 거리로 나와 연초를 태웠다. 그렇게 P는 내무부장관님을 뵙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절대적으로 많은 양을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심한 주취 상태였다. 내 주사 중 하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정리정돈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집에 비틀거리며 돌아와 갑자기 현관에 있는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던지. 옷을 군대에서처럼 각을 맞춰 개어 놓는다는 것이 그 예이다. 나는 똑같이 짐을 정리하고 욕조에 물을 받은 후 들어갔다. 한동안 그 상태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2~30분쯤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왔고, 나는 마저 깨끗하게 씻었다.

숙소는 꽤 깔끔하고 괜찮은 곳이었다. 비즈니스 호텔이라 그런지 옆 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가끔 정체 불명의 소리를 듣긴 했다). 난 TV를 켜고 소리를 높인 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옷을 다시 입고 거리로 나왔다. 모텔촌에서 그나마 대로에 가까이 위치해있던 숙소였다. 나는 괜히 껌껌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원룸촌과 고시원에서 일반 주택 가정 집 사이로 골목은 이어졌다. 24시간 셀프 빨래방, 편의점이 종종 모습을 드러냈고 번화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포차와 술집들이 등장했다. 전혀 건전해보이지 않는 노래방 앞에 춥지도 않은지 짧은 옷차림의 여성들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거기서 더 길을 따라가니 건대 입구 근처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났다.

평일 밤이었지만 헌팅 포차와 클럽에서는 시끄럽게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고 할로윈 시즌이 다가온 것이 느껴지는 복장의 사람들도 아주 가끔씩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냥 취기가 더 빨리 나갔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어폰을 꽂은 채 계속 걷기만 할 뿐이다. 대학 동기들로 보이는 무리,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커플, 한껏 멋을 낸 옷차림으로 칙칙하게 남자들끼리 있는 무리. 얼핏봐도 초면인데 같이 술을 마시고 싶은 것인지, 짝짓기가 목적인지 분간이 잘 안가는 아직 섞여 들지 못한 무리들.

대충 '쏜애플'의 곡 가사 중에 이런 밤거리를 보고 썼을 것 같은 가사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곡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굳이 곡을 찾아 듣지 않고 오래된 플레이 리스트를 돌려 들으며, 그 중에 그냥 지금 듣고 싶은 곡이 나오면 거기서 손가락을 멈췄다.

그쯤 H가 곡 추천을 해줬다.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어찌저찌 음악 이야기로 대화의 주제가 넘어갔고 그녀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곡을 여럿 보내줬다.

사실 나는 음악에 있어서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면서도 둔감한 사람이다. 2010년대 곡이면 내게는 비교적 '최신곡'이다. 신곡을 잘 따라잡지 못하고 항상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디스코그래피를 따라 과거로 탐험하는 편이다. 그렇게 특정 시기에 특정 곡이 아니라 앨범에 꽂혀 있게 되고, 이는 그 시기의 최신 곡과 전혀 무관하다. 또 일정 주기가 지나면 예전에 좋아하던 앨범을 다시 집중적으로 듣는다. 때문에 내가 군대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개념아 '입대곡'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추천해준 곡은 제법 괜찮은 곡들이었고, 성수와 건대를 관통하는 좁은 골목에서 들으며 배회하기에도 좋은 음악이었다. 나는 최대한 음악을 크게 들었다. 워낙 거리의 소음이 시끄러운 골목이 많았고, 그때는 귀에 박힌 이어폰이 내는 소리 사이로 소음이 틈입해오지 않게끔 하고 싶어진다. 아주 가끔씩 그 틈을 비집고 틈입해 오는 소음들은 이상한 만족감을 준다.

번화가의 밤 거리는 골목마다 쓰레기와 담배 꽁초가 즐비하다. 본래 건대 입구역 근처에 지정된 흡연 구역이 있었는데 이제 사라진 모양이다. 사람들은 대충 눈치를 보며 외진 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누군가 스타트를 끊으면 첫 주자가 남긴 담배꽁초는 마킹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렇게 새벽이 되면 꽁초가 한 바닥 굴러다니는 것이다. 마치 강아지들이 서로 영역 표시를 하기 위해 마킹하는 것과 흡사한 모양새다.

나도 흡연자지만, 그리고 주변에서 '애연가'로 인정해주는 헤비 스모커지만 한 가지 싫어하는 게 있다. 가래침을 뱉는 사람들. 나는 흡연을 시작한 이래로 담배를 태우면서 길 바닥에 침을 뱉어 본 적이 없다. <스타크래프트>의 히드라리스크도 아니고 걸죽한 침을 뱉는 것을 보면 괜히 비위가 상한다. 이런 번화가에서는 흔한 풍경이고,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행위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들이 '마킹해 놓은' 외진 곳에서 담배를 같이 태우지만, 나는 빈 담배갑에 내가 태운 꽁초를 넣어서 쓰레기통을 끝끝내 찾아 버린다. 진짜 대단한 허영심이다.

나는 번화가를 다시 빠져나와 조용한 주택들 사이의 골목을 걷는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붉은 벽돌담과 회색의 콘크리트 벽을 비추는 거리를 나는 좋아한다. 이때쯤, 에어팟에서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가 들려왔다. 나는 H가 추천해준 마지막 곡까지 다 듣고 내 플레이리스트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오른쪽 에어팟은 배터리가 완전히 나가서 한 쪽으로만 들어야했고, 휴대폰 배터리도 1%에서 간당간당했다.

숙소에 돌아와 작업을 위해 노트북을 켰다. 시간은 새벽 3시를 향해 가고 있었고, 나는 결국 작업을 거의 하지 못한채 다시 노트북을 덮었다. 음악을 틀고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음악을 듣는 것처럼 나는 좋아하는 책을 일정 주기가 되면 다시 읽는다. 이 책 또한 그렇다. 처음 읽었을 때 충격이 컸다. 플롯이니 스토리니, 문장력이니 하는 것도 그 충격에 일조했지만 자극적이면서도 신선한 소재가 가장 큰 공신이었다.

책을 다시 읽으면 내가 기억하는 것과 많이 다름을 깨닫는 경우가 종종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기억을 편집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성애에 대한 묘사 수위가 높은 것은 내 기억이 맞았지만 겨울에 조난당한 커플이 트렁크에서 섹스를 하고 서서히 죽어간다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가 취해서 글을 제대로 못 읽은 것인지도.

휴대폰 스피커로 틀어 놓은 음악 사이로 도시의 소음이 조금씩 들려온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인데 성수의 거리에는 차들이 꽤 지나다닌다. 조용한 거리에 차 한 대가 지나갈 때 내는 소음은, 아예 차량으로 주차장을 이루는 시간과는 다른 성격과 운율로 귀를 거슬리게 한다. 나는 이어폰을 착용한 채 작업할까 고민하다가 그만 뒀다.

언젠가 새벽은 낭만적인 공간이었다. 학창 시절의 새벽은, 낮에 어린이들에게 내어준 놀이터를 어른 흉내내는 연애의 공간으로 바꿔놓았었다. 수험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하루의 피로를 모두 새벽의 하늘 색으로 칠해 감추는 휴식처였다. 한창 일을 하던 시기에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머리를 쥐어짜며 고군분투하는 고뇌의 시간이었고, 군 복무 시절에는 경계 작전을 마치고 돌아와 어두운 하늘 위로 담배 연기를 날려 보내는 귀하디 귀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그런 새벽이 내게도 계속 될 줄 알았다. 때로는 연인의 몸짓 소리에, 때로는 종이 위를 휘젖는 펜 소리에, 때로는 지웠다가 쓰기를 반복하는 자판 소리, 또 때로는 조용히 타들어가는 연초소리, 그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침묵을 필사적으로 경청하는 순간들의 연속. 그 어두움과 침묵의 무형의 하모니가 조용히 스며드는 시간.

하지만 백야는 계속 됐고, 새벽은 신비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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