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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고.

by J_One. 2022. 6. 30.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저자 : 피에르 바야르
출판 : 여름언덕
발매 : 2008.02.20

 

정신없이 바쁜 요즘, 김영하 작가의 '김영하 북클럽' 매달의 마무리를 하고 있다. 6월 중순부터 날도 많이 더워지고 최근에는 연일 비가 오고 습해지면서 기운이 계속 처지는 나날이다.

 

사실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 기능을 이용하는 게 왠지 모르게 낯부끄러워서 북클럽 방송 참여만 하고 포스트는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달의 경우 '나의 독서론'을 올려달라는 작가님의 부탁에 따라, 또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져 오랜만에 글을 썼다.

 

하지만 내가 쓴 장문의 글은 인스타그램 2200자 제한에 걸려 대부분 내용을 잘라야했다... 게다가 그 사실을 알기 전, 나름 퇴고를 한 장문의 글을 따로 저장하지 않고 그대로 내용 자르기에 들어갔다. 그걸 살려놓고 여기에 올려놓았어야 하는데 말이다.

 

책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지극히 내 경험에 근거한, 영양가 없는 글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것은 가치있는 것'이라는 올해 만난 글쓰기 교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것도 여기에 기록으로 남겨본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신뢰하되, 진리를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심하라'
– 앙드레 지드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앙드레 지드의 문장이었다.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땐, 교묘한 방식으로 제목과는 다른 결론을 향해 곡예를 펼칠 글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딘가 유해해 보이는 제목에 정합한 문장들을 줄 세우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고, 이는 내가 가진 ‘통념’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하지만 제목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 물론 현시적인 처세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이건 내 예상이 맞았다). 책과 독서 전반에 대한 층위를 교열하는, 보다 근본적인 화두를 던진 글이었다.

 

 

‘현학적이지만 정갈한 표현’ 내 독서 방식은 긴 종이 뭉텅이에서 앞의 조건에 상응하는 문장 하나를 추출해 내는 것이다. 내가 정리하는 것이 아닌, 텍스트에 있는 그대로의 문장만을 고집한다. 하지만 문장이 선정되는 과정에서 표현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읽었을 때 한 문장이 조각되기 위해 쓰인 수많은 활자들이 긁어모은 사유나 관념을 다시 촉발시킬 수 있는 일종의 ‘환유성’이 항상 중심에 있다.

 

‘스스로 세운 준칙과 준거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되게 하라’
–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정언명령을 한국 작가의 인용을 통해 처음 접했다. 스무 살에 읽었던 그 책은 지금까지 정언명령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까지도 난 칸트의 저작을 한 권도 읽지 않았으며, 큰 돈 주고 샀던 <순수이성비판>은 새 책에 가까운 상태로 책장에 전시되고 있다.

 

이 책에 대해 말할 일이 생기면 나는 항상 정언명령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 뒤에 붙는 장황한 문장들은 저자가 제시한 통찰은 아니고, 칸트의 표현에 담긴 파상적인 활력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문장에 투영시킨 담론과 사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손질된 과정이 항상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 책을 접한 스무 살 무렵과 이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앞 절에만 집중해서 문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무게 중심이 조금씩 뒤의 절로 옮겨가는 경험을 했다. 이제 내가 이 문장을 받아들일 때는. 다시 말해, 이 책이 내게 던진 담론을 반추할 때는 스무 살의 내가 했던 사유와는 사뭇 다른 것들이 머릿속을 유영한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에서 내가 책을 다시 펼치는 일은 없었다.

 

‘우리가 복수(複數)로 존재하는 한, 다시 말해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며 움직이고 행동하는 한,
유의미한 것은 오직 우리가 서로 이야기로 나눌 수 있고. 
또한 혼자만의 대화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즉 말하기를 통해서 의미가 생겨나는 일뿐이다’
– 한나 아렌트

비슷한 예로 내가 캐롤린 엠캐의 <혐오 사회>를 읽었던 경험을 들 수 있다. 위의 경우처럼, 엠케의 책은 내게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 한 문장을 소개해 준 책으로 남아있다.

 

나는 아직도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다원주의’ 개념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던 당시의 시대상과 엠케가 책을 낸 현대의 분위기를 비교하며 왜 저자가 한 세기 전의 저명한 철학자를 호명하고 그녀의 문장을 소환했는지는 나름대로 유추할 수 있다. 내가 당시 한 대부분의 사유는 이 문장 속에 녹아 있고, 정치,사회 분위기를 보면서 느낀 감정이나 생각들도 여전히 얽혀 있다.

 

‘읽어야 하는 책은 책이 아닌 교과서다’ – 강신주


몽테뉴가 제시한 ‘화면 책’의 개념과 유사하게 내게 있어서 독서의 개념은 기억을 담고, 재생시킬 매개체를 찾는 과정인 동시에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고 그것들을 나만의 사유로 치환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독서에 있어서 책의 내용을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는지는 적어도 나에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을 택하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다. 독서로 내게 유희를 주는 방법은 이뿐이었다. 책을 좋아한다고 자부하지만 기간이나 형식이 정해진 독서는 피하고 싶은 지난한 과정이다. 독서를 함에 있어선 휘발적인 사유들이 책 속의 문장을 찾아 충분히 융해될 수 있는 여유가 확보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도발적인 제목으로 초장부터 내게 오판을 유도해 내는데 성공한 이 책은 독서에 대한 내 시야를 크게 확장시켰다. 동시에 ‘내 독서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을 깔끔한 지워버린 글이기도 하다. 이 책의 표현처럼, ‘든든한 원군’을 얻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