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에 이 책을 선물받았다. 미리 연말과 생일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았다고 하니 놀랐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는 하루키의 단편이 원작인 <버닝>을 꼽고,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는 그와 작품의 정조랄 것이 묘하게 닮아 있는 김영하 작가를 이야기하지만 난 사실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표현과 문장은 끝없이 들어오면서 자랐다. 심지어 나는 글을 쓸 때 그의 표현을 인용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내가 읽고 써온 길지 않은 시간은 항상 하루키의 글을 연원에 둔 셈이다.
지난여름엔 폭우로 주로의 길이 뒤집혔다. 생각보다 빠르게 벗겨진 주로에는 새 피부가 덮다. 하지만 가로등은 오래 꺼져있었다. 여름밤이 부린 객기가 완전히 꺼진 가을이 와서야 다시 불이 들어왔다. 특히 반환점 직전 2.5km, 미금 - 정자 구간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항상 페이스를 올리는 지점이었기에 중간중간 도로가 페인 곳에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사이좋게 발목을 접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깜깜한 구간을 뛰는 것이 좋았다. 마치 드라이브를 하다가 가로등이 꺼진 도로를 만날 때의 묘한 감정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내겐 전조등이 없다는 것. 마주 오는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숨소리와 발소리가 더 요란하게 울리는 듯해 나도 모르게 속도를 더 올리게 된다.
2018년 첫 풀코스 마라톤을 위해 샀던 마라톤화를 아직까지도 신고 있다.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5,000km가 넘는 거리와 열 번의 대회를 함께 뛰었다. 심지어 지난해 생애 처음으로 참가했던 트레일러 러닝 대회에서도 이 신발을 신었다. 덕분에 고저차만 1,500m 넘게 나는 42.195km 코스의 산길을 뛰며 발목이 정확히 직각으로 꺾이는 것을 여러 번 관찰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로드 러닝 마라톤화는 접지력도 좋지 않아 산길을 뛰어내려가는 '다운힐'로 기록을 올리는 트레일 러닝 대회에 부적합하다 못해 위험하다. 그럼에도 이 신발을 고집하는 것은 나 홀 부여한 고집스럽고 고루한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기록을 위해서라도 요즘 트렌드라는 카본 들어간 마라톤화를 사야겠지만 해질 대로 해진 신발을 버리진 못할 것 같다.
러닝을 떠나서, 또 러닝을 하는 도중이나 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관성'이다.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자연스럽게 환복해 거리로 나가고, 의식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거리를 원하는 속도로 뛰게 몸을 길들여야 한다. 매번 뛰는 순간은 고통스럽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말라버린 입안으로 목에서 야릇한 냄새가 올라와 진동한다. 하지만 그 구간도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몸은 기억하고 있고 오히려 페이스를 더 끌어올리게 만든다. 구력이 늘수록 기록을 단축시키는 게 당연하기에 운동을 오래 했다고 러닝이 쉬워지는 날은 없다. 그냥 억겁 같은 힘든 순간들이 결국 끝난다는 것을 알뿐이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관성으로 버티는 시기다. 동시에 관성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는 게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그런 경험들이 반복되다 보면 알게 모르게 타성에 젖는다. 능력과 영감이 바닥을 드러내는 시기가 찾아오면 지키 루틴 자체에 회의가 들고 의욕은 지하로 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때마다 타개책은 결국 매번 다시 관성으로 귀의하는 것뿐이었다. 조금 더 강도를 높이고, 조금 더 시간을 늘리며 다시 궤도에 올라 버티면 예상치 못한 기회가 늘 찾아왔다. 과정의 정직함이 항상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불확실함에 익숙해진 것이 비교적 정직한 러닝에 집착하게 만든 요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화를 선물하지 않는다. 덧없이 시드는 생화와 영원히 꽃 핀 조화는 비견될 수조차 없다. 해를 거듭할수록 마주하게 되는 하루하루의 토양은 건조해지고, 지금보다 몇 해 어렸을 때처럼 사유로 이를 꿀 여유는 줄어든다. 관성과 타성은 끝없이 환원되며 나이만큼 마음도 조금씩 늙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가의 시작에는 항상 책임보다 낭만이 먼저 깃든다. 우리는 시들지 않는 꽃이 아니라 시들지라도 꽃피운 과정에 동한다. 좇아 달리다 보면 닿지 못할지라도 어느 순간 가까워져있고, 어느 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 선을 넘어있기도 한다. 낭만이라는 묘연한 말에 책임을 깃들게 하는 것은 결국 관성으로 빚은 책임이라고 믿고 싶다. 이 또한 서로 환원되는 우리의 동원이라고.